최근 김연수 작가님의 <지지 않는다는 말>을 읽었는데 그 책에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라는 책이 나오는 부분이 꽤 흥미로워서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도서관에서 빌리고 이틀만에 다 읽었다. 그만큼 흡입력 있고 재밌는 책이었다. 책을 다 읽고 뒷부분에 해설에서 알게 된 건 이 책은 헤밍웨이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이다. 보수적인 동양인 관점에서 보면 다소 충격적인 스토리지만, 소설이 아니라 실제 이야기라는 것이 더 놀랍다.
출판일: 1926년
줄거리: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0년대 파리, 해외 특파원 자격으로 파리에서 생활하는 미국인 신문기자 제이콥 반스는 전쟁에서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에 부상을 입고 귀향했다. 그 부상으로 성(性)기능을 상실한 그는 매력적인 영국 여인 브렛과 사랑에 빠지고서도 사랑을 나눌 수 없어 괴로워한다. 브렛 역시 간호 자원봉사자로 참전했다가 전장에서 연인을 잃었다. 돌아온 후 남작 신분의 해군 장교와 사랑 없는 결혼을 하지만 곧 헤어지고, 제이콥의 친구인 참전 영웅 마이클 켐벨과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성격의 마이클 역시 전쟁을 겪은 후 삶의 목적을 상실한 채 술로 나날을 보내며 고통을 잊으려 하고, 브렛 또한 끊임없는 남성 편력으로 상실감을 달래려 한다. 여기에 전직 권투선수이자 한 편의 소설을 발표한 후 더는 글을 쓰지 못하는 고지식한 유대인 친구 로버트 콘이 브렛에게 한눈에 반하면서 미묘한 긴장감이 유발되고, 제이콥의 오랜 친구인 작가 빌 고턴이 미국에서 건너와 이들 무리에 합류한다. 어느 여름날, 이들 다섯 친구는 스페인 팜플로나로 축제와 투우를 즐기러 떠나고, 이곳에서 브렛이 열아홉의 젊은 투우사 페드로 로메로와 사랑에 빠지면서 이들 사이에 감돌던 긴장감은 축제의 열기 한복판에서 결국 폭발한다. (시공사 출판사 서평 참고)
이 소설의 대부분의 갈등이 브렛이라는 여성으로부터 진행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브렛은 34세의 여성으로 어떤 남성들이 봐도 한눈에 반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가지고있는 우아한 여성이다. 자신이 마음에 드는 남자는 모두 유혹할 수 있고 결혼할 수 있는 여성이지만 그런 욕망이 줄 수 있는 행복감은 잠시, 마음속 깊은 곳에는 깊은 우울감과 상실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느낄 때마다 주인공인 제이콥에게 돌아온다. 스토리만 들어보면 브렛이 굉장히 나쁜 여성 같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그녀가 나 빠보이긴 했으나 밉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솔직하기 때문이다. 작품해설에 브렛에 대한 해설이 나온다.
... 자신의 욕망을 솔직히 드러낼 뿐만 아니라 제이크에 대한 사랑으로 그 욕망을 희생하거나 억압하기를 거부하는 신여성 브렛도 자기 부정에 근거한 관계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제이크를 사랑했다. 하지만 전쟁으로 성 기능을 잃어버린 그는 그녀와 함께할 수는 없었다. 그걸 브렛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랑으로 자신의 욕구를 희생하지 않았다. 다른 남성들을 자유롭게 만났으며 또는 잔인해 보일지 몰라도 제이콥에게 자신이 마음에 드는 남자(투우사)를 직접 소개해달라고까지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욕구를 숨기지 않는다. 투명하게 드러낸다. 그렇기에 일련의 많은 욕구를 숨기고 사는 우리들은 그녀의 행동이 불편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앞장서서 비난할 수도 없게 된다.
내가 지옥에 보낸 남자들을 생각하면, 그 대가를 지금 다 치르고 있는 것 같아.- 45p
"우리 같이 살 순 없어, 브렛? 그냥 같이 살 순 없어?"
"안돼. 난 당신을 속이고 온갖 사람이랑 바람을 피우게 될거야. 당신은 견디지 못할 테고." -85p
"내 인생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고 있는데, 내가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어"
"투우사 말고 인생을 최대치로 사는 사람은 없어." -22p
"자네 인생이 몽땅 지나가버리고 있는데 그걸 이용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 들어본 적 없나? 앞으로 살 날 줄 반이 벌써 지나갔다는 걸 알고 있어? -23p
책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나온다. 로버트 콘, 빌 고턴, 브렛, 마이크 등등. 그리고 이 인물들이 서로 대화하는 부분들이 많이 나오는데, 각 인물의 성격을 반영한 대화들이 흥미롭다. 대화들 사이로 위트가 엿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아래 대화는 내가 이 소설에서 제일 좋아하는 대화다.
"데려가지 그래"
"안 좋아할 거야, 프랜시스가 좋아할 만한 일이 아니야. 사람들이 많은 곳을 좋아하거든"
"그럼 지옥이나 가라 그래" -62p
뜬금없는 표현들이지만 나는 왜 이렇게 이 표현이 좋은지 모르겠다. 위트 있으면서 재밌어서 책을 읽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헤밍웨이의 유머감각이 전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소설의 초반은 파리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면서 파리의 다양한 아름다운 풍경과 지명과 가게이름이 나온다. 그리고 중후반부에 가면 주인공과 친구들이 스페인으로 투우를 보러 떠나는데 그때부터는 스페인에 대한 풍경들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투우'라는 스포츠에 대해서도 이 소설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냥 빨간 망토를 들고 흔드는 건 줄만 알 알지 그렇게 예술적이고 전문화된 영역이 있는 스포츠라는 것은 또 처음 알게 되었다. 내가 그 어쩌면 잔인할 수도 있는 스포츠를 잘 볼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인생에 한 번쯤은 투우를 보고 투우사들의 예술적인 움직임을 보고 싶다.
작품에 대한 해설을 찾아보면 '전쟁 이후세대의 상실감, 길 잃은 세대를 위로해 주는 소설..' 등등의 설명이 많았지만, 그런 사실들보다 그냥 이 책이 좋았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이 하나씩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 같았고, 조금씩 불완전한 그들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투영해서 볼 수도 있었다. 로버트 콘의 지질한 모습, 브렛의 욕망과 외로움, 마이크의 과장스러움 등. 불편한 부분들이었지만 그랬기에 나에 대해서도 조금 더 들여다볼 수 있던 책이었다. 사실 아직까지는 고전 명작들을 볼 때 어떤 사람들이 느끼는 것처럼 전율을 느끼거나 감동을 받지는 않는 것 같다. 그보다는 무라카미하루키와 같은 현대 작가들이 나에게 더 와닿는 것 같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헤밍웨이도 그때 그 시절의 전쟁 후 세대에게 열광을 얻었던 작가다. 그 이유는 그가 엄청나게 수려한 문장의 단어를 써서 그런 게 아닐 것이다. 그 세대의 그 감정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글로 써내려 가서 그런 것 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고전 작가들의 작품보다는 현대 작가들의 작품에 몰입하고 감동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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