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일 : 1980년 (한국 출판일 1997년)
<1973년의 핀볼>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반인으로서, 그러니까 전업 소설가가 되기 전 재즈바를 운영하며 밤에 집으로 돌아와 부엌 테이블에서 쓴 마지막 소설이며,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 3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3년의 핀볼-양을 쫒는 모험]중 2번째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두 번째에 해당하는 소설답게 단편소설과도 같은 길이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상, 하 두 권으로 나눠진 양을 쫓는 모험의 딱 중간두께의 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소설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처음 읽었을 때 ‘이게 뭔 내용이여...’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고 반면에 <양을 쫒는 모험>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중에 가장 재밌다’라고 느낀 책중 하나이다. 두 개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스토리다. 물론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도 크게 나와 친구 쥐의 이야기라는 건 있었지만 소설을 끌고 나가는 큰 스토리가 없어서 끊기는 느낌이 많이
들고 스토리보다는 인물들의 심리 묘사 위주로 진행된다. 반면에 양을 쫒는 모험은 제목 그대로 양을 쫒기 위해 주인공이 다양한 사건에 맞닥뜨리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때문에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1973년의 핀볼>은 그 두 개의 딱 중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앞쪽에는 별다른 이야기 없이 쥐와 내 이야기가 혼재되어 나오다가 뒤쪽에는 ‘나’가 나오코를 잃고 난 후 빠졌었던 동네 오락실의 쓰리 플리퍼 스페이스십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가 나오며 흥미로워진다.
<바람에 노래를 들어라>에서는 쥐와 나의 혼란스러운 심리묘사를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양을 쫒는 모험>에서도 ‘쥐’라는 인물 때문에 주인공이 난처한 일에 휩쓸리게 된다. 무리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쥐는 작가의 생각과 무의식을 반영하는 인물인 것 같으나 쥐가 나오는 3개의 책을 읽어봐도 쥐는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하다. 이 책에서도 사랑하는 여성이 생기지만 그는 일부러 그 여성에게 연락하지 않고 이별을 한다. 그 이별을 통해서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을 혼자 견딘다. 그의 전작과 후작에서도 그렇듯 쥐는 스스로를 고통 속으로 밀어놓는 듯한 행동을 많이 한다. 스스로를 단죄하듯이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더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 되고 만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말할 때 자주 언급되는 단어는 ‘상실’이다. 그의 대표작의 이름이 ‘상실의 시대’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도 다양한 상실이 나온다. 나오코와의 이별, 배전반과의 이별, 핀볼기계와의 이별, 쌍둥이 자매와의 이별 등등등. 그 상실은 끝이면서 시작이기도 하다.
책의 앞부분이서 핀볼 기계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 나온다.
당신이 핀볼 기계에서 얻는 건 거의 아무것도 없다. 수치로 대치된 자존심뿐이다. 하지만 잃는 건 정말 많다. 역대 대통령 의 동상을 전부 세울 수 있을 만큼의 동전과 되찾을 길 없는 귀중한 시간이 그렇다. 당신이 핀볼 기계 앞에서 계속 고독한 소모전을 벌이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은 프루스트를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어 떤 사람은 자동차 전용 극장에서 여자 친구와 <진정한 용기> 를 보면서 진한 애무에 열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들은 시대를 통찰하는 작가가 되고 혹은 행복한 부부가 될지 도 모른다. 그러나 핀볼 기계는 당신을 아무 곳에도 데려가지 않는다.(...)
핀볼의 목적은 자기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변혁에 있다. 에고의 확대가 아니라 축소에 있다. 분석이 아니라 포괄에 있다. 만일 당신이 자기표현이나 에고의 확대, 분석을 지향한다면, 당신은 반칙 램프에 의해서 가차 없는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즐거운 게임이 되길 빈다.
개인적인 해석으로는 핀볼기계는 결국 ‘무의미함’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무의미함이 가치 없고 쓸모없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 즉 무의미함의 의미다. 작가는 만약 자기표현이나 에고 확대, 분석등의 목적을 갖고 게임에 참여한다면 핀볼게임에서는 이길 수 없을 뿐더러 반칙이라는 보복을 받게 된다고 한다. 결국 자기 자신을 버려야, 텅 비워야 이길 수 있는 게임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나오코의 죽음을 겪어 자신의 내부가 텅 비고 상실되었을 때 핀볼게임에 빠져들 거
핀볼 게임에서 위로를 얻는다. 핀볼게임은 인간성의 상실을 추구하면서 또 반대로 상실된 인간을 치료해 주는 도구가 아닐까.
한 계절이 문을 열고 사라지고 또 한 계절이 다른 문으로 들어온다. 사람들은 황급히 문을 열고 이봐, 잠깐 기다려, 할 얘기가 하나 있었는데 깜빡 잊었어, 하고 소리친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다. 문을 닫는다. 방 안에는 벌써 또 하나의 계절이 의자에 앉아서 성냥을 켜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 다. 잊어버린 말이 있다면 내가 들어줄게, 잘하면 전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하고 그는 말한다. 아니, 괜찮아, 별로 대수로운 건 아니야, 하고 사람은 말한다. 바람 소리만이 주위를 뒤 덮는다.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하나의 계절이 죽었을 뿐이다. -53p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다 자신의 시스템에 맞춰 살아간다. 그것이 내 것과 지나치게 다르면 화가 치밀고, 지나치게 비슷하면 슬퍼진다. 그뿐이다. -78p
"핀볼 잘해요?"
"전에는 잘했지. 내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분야였 거든."
"나한테는 그런 게 아무것도 없어요."
"잃어버릴 것이 없어서 좋겠군." -176
쥐는 블라인드를 빈틈없이 내린 방 안에 서 벽에 걸린 전기 시계의 바늘을 보며 지냈다. 방 안의 공기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선잠이 몇 차례 그의 몸을 스쳐 지 나갔다. 시곗바늘은 이미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어둠의 농담이 몇 번인가 되풀이되었을 뿐이다. 쥐는 자신의 육체 가 조금씩 실체를 상실하고, 무게를 잃고, 감각을 상실해 가는 걸 견뎌냈다. 몇 시간, 도대체 몇 시간을 이러고 있었을까, 하 고 쥐는 생각 했다. 눈앞의 흰 벽은 그 숨결에 맞춰서 천천히 흔들렸다. 공간이 어떤 밀도를 가지고 그의 육체를 침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순간, 그는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몽롱한 의식 속에서 수염을 깎았다. 그 리고 몸의 물기를 닦고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마쳤 다. 새 파자마를 입고 침대로 올라가서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 다. 그러자 깊은 잠이 찾아왔다. 아주 깊은 잠이었다. -202
<1973년의 핀볼>은, 삶은 우리가 주인이 되어 전원의 스위치를 올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암시하는 소설이다.
입구는 출구요, 절망의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굳은 시체에 열정 불어넣기를 반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썩어가는 몸에 불과할 뿐이다.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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