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신문에서 정보라 작가를 발견하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그녀의 책이 궁금해서 [저주토끼]를 읽었었다. 나에게 그 책은, 물론 재밌긴 했지만 속으로는 '그 정도인가..?'라는 의문을 머릿속에 띄우며 책장을 덮었던 것 같다. 원래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은 이번에 읽은 <너의 유토피아>였지만,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가보니 너의 유토피아는 없고 저주토끼만 있어서 먼저 읽었는데, 이번에 도서관에 갔더니 때마침 이 책이 책장에 있어서 빌려읽게 되었다.
너의 유토피아는 세계 3대 SF 상중에 하나로 꼽히는 미국 필립K. 딕 상 후보에 오른 책이다.
저주토끼가 호러와 판타지를 섞은 느낌이었다면, 너의 유토피아는 SF의 정석 같은 단편소설 8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은 가장 처음 나오는 이야기가 가장 재밌고 뒤로 가면서 힘이 빠지는 소설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로 이 책은 (내 기준) 처음 이야기가 보다는 가면 갈수록 더 재밌었던 것 같다.
너의 유토피아 목차
- 영생불사연구소
- 너의 유토피아
- 여행의 끝
- 아주 보통의 결혼
- One More Kiss, Dear
- 그녀를 만나다
- Maria, Gratia Plena
- 씨앗
모든 이야기가 재밌었지만 특히 내가 좋았던 이야기는 아래 4가지였다.
너의 유토피아
이 책의 제목이자, SF 소설 다웠던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의 화자가 먼 미래에 발달된 자율주행 자동차인데, 진짜 자율주행 자동차가 된 것 같은 표현과 생동감 넘치는 묘사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자동차'로서의 삶을 공감(?)할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여행의 끝
SF와 좀비가 결합된 독특한 소재의 이야기다. 대략적인 내용은 지구에 좀비로 변하는 전염병이 퍼지고 마지막 인류의 구원이라고 여겨지는 팀들이 우주선에 실려 우주로 떠난다. 하지만 거기서도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조금 뻔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여기서 이 이야기만 주는 독특한 설정은, 좀비 바이러스라는 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좀비 바이러스와는 다른 종류로 묘사된다.
일상적인 모습으로 살다가 자연스럽게 타인의 신체를 먹기때문에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일상적으로 함께 사는 기족, 친구, 연인이 좀비여도 모른다는 설정이 이 이야기를 일반 좀비 이야기와는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반전이 기다리고 있기에 충격받으면서도 정말 재밌게 읽었다. 이 이야기는 영화화되어도 정말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One More Kiss, Dear
고도로 발달 된 사물인터넷 이야기인데, 독특하게 화자가 엘리베이터이다. 사물인터넷 엘리베이터가 5305호에 새로 들어온 고령의 거주자를 만나고 그녀에 대해 호기심이랄까 그런 것을 느끼며 다가간다. 모든 것에 접근할 수 있는 사물인터넷은 그녀의 모든 기록을 조회한다. 핸드폰 GPS까지 접근하고 거기서 얻은 정보를 가지고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음악을 틀어주고 지병이 있는 그녀에게 정보를 전달한다. 스토커와 다름없는 모습이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고 하는 사물인터넷이 과연 내 일거수일투족을 쫓아다니는 스토커와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는 진부한 사랑이야기 일수도 있다. 다른 사람과 다르게 자신을 대해주고는 사람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그녀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싶어 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을 해주고 싶어 하는 이야기다. 그 화자가 사물인터넷을 탑재한 엘리베이터라는 것만 빼고는.
그녀를 만나다
이 이야기 또한 인상깊었다. 미래를 배경으로 하며 120살 된 할머니가 주인공이다. 이 이야기는 끝 문장을 위해 앞에 모든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끝문장을 보고 숙연해지기도 했고 찡해지기도 했고 괜히 그녀의 이름을 검색창에 검색해보기도 했다.
아래는 내가 좋았던 책속의 문구들이다.
"우리는 절대 잊지 않습니다."
나도 절대 잊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어떤 것은 잊게 되었다. 내가 잃어버린 동지들의 모습들이, 마음에 불로 새겨진 줄 알았던 그 소중한 이름들이 세월 속에 희미하게 불로 새겨진 줄 알았던 그 소중한 이름들이 세월 속에 희미하게 바래다가 사라졌다. 절대 잊지 않는 건 그 순간순간의 감정이었다. 기억도 논리도 이성도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이 다 사라져도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감정이다. -246
조용하고 조금은 나른했던 지하철 안의 품경과 광장에서 얼굴을 스치던 찬 바람을 나는 가끔 아무 맥락 없이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결코 잊지 않는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삶의 엉뚱한 순간들 속으로 과거의 상실이 비집고 들어오는 걸 받아들이면서 그래도 잊지 않고 세상을 이렇게 만든 빌어먹을 새끼들이 골로 가는 꼬라지를 보고야 말겠다고 나는 살았다. -247
내가 데모를 하고 오체투지를 하고 온라인 서명을 하고 국회 앞에 드러눕고 청와대 앞에 드러눕는다고 세상이 당장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계속 소리 없이 얻어맞고 누군가는 계속 소리 없이 죽어갈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살아남은 누군가 앞에서 나는 최소한 부끄럽지 않고 싶다....(중략) 일단 뭐라도 해야 좀 덜 열받는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의 정신건강과 나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위해소 데모를 하고 있다. 글도 써야 되는데, 주로 데모를 하고 있다. -360
스페인 철학자 미겔 데 우나무노는 역작 <인색의 비극적 의미>에서 상실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특정짓는 가장 커다란 특성이며 그러므로 상실을 겪었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행동은 그 상실된 것을 대체하거나 복구하기 위해 빨리 움직이는 게 아니라 멈추어서 애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361
그러니까 상실하면 애도해야 하고, 상실을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해서는 생존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상실된 사람들을 누가 기억해 줄 것인가. 그리고 행동으로 애도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런 상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이다. -362
그래도 어쨌든 내가 몸과 마음으로 애도했고 애도하며, 더 나은 사회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서, 나도 당신의 생존을 위해서 거리로 나아가 행동하고 노력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362
정보라 작가의 이야기들은 신선하고 새롭다. 이 책을 읽으며 왜 그녀의 책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지 백번 알게되었다. 그녀의 책은 단순히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흥미를 주는 것뿐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 그 문제를 바라보는 그녀의 따뜻한 시선을 담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정보라 작가님에 대해서도 찾아봤는데, 역시나 사회적인 활동에 많은 참여를 하고 있는 분이었다.
그녀의 책을 읽어 보았을때 그녀가 똑똑한 지식인으로 (그녀는 연세대 - 예일대를 나온 엘리트다.) 까칠하고 도도한 성격을 가진 사람일 거라고 막연하게 예상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인터뷰나 영상들을 보면 옆집에 살 것 같은 친근한 이미지에, 포장하지 않고 솔직하고 털털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고 더 그녀의 다른 책들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녀가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모습들도 물론 내가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는 큰 역할을 했다.
그녀가 책속에서 사용하는 소재들도 SF, 미래, 좀비 등 어떻게 보면 뻔하고 익숙한 소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신선하게 만드는 건 이런 소재들의 결합이며, 또 그 안에서 인간성에 대한 깊은 탐구로 표현되는 이야기들이 있기에 그녀의 책이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5년 4월 18일 필립K. 딕 상의 수상작이 발표된다고 하는데, 꼭 그녀의 책이 받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그녀의 책을, 그녀의 삶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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