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출판: 문학사상
227p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몇 달 전 친구에게 빌린 후 읽지 않고 내 책상 한쪽에 항상 제쳐져 있던 책이다. 2023년 마지막으로 읽을만한 책이 없나 뒤져보는 와중에 이 책을 발견하곤 앞부분만 훑어본다는 게 결국 재미있어서 끝까지 다 읽어버렸다.
요컨대 예술 행위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성립부터 불건전한 반사회적 요소를 내포한 것이다•••그러나 내 생각이지만 오랫동안 직업적으로 소설을 써나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위험한(어느 경우에는 목숨을 내놓는 경우가 되기도 한다) 체내의 독소에 대항할 수 있는 자기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강한 독소를 바르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좀 더 힘 있는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자기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오랜 기간에 걸쳐 유지해 나가려면 강력한 에너지가 필요하게 된다. -149p
무라카미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려 90여 작품을 발표했다. 하나도 쓰기 어렵다는 장편소설만 해도 11편을 썼고 그 외 단편소설도 15권이나 썼다. 짧은 글이라도 써본 사람들은 글을 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알 것이다. 그의 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단단해지고 깊어지고 있다. 젊었을 땐 넘치는 에너지로 좋은 글을 써 내려가는 작가들이 많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그 글을 유지하거나 더 나아가 더 좋아지게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당연하게 후자다.
젊었을 때 뛰어나게 아름답고 힘이 있는 작품을 썼던 작가가 어느 연령대에 접어들자 급격하게 피폐해져 가는 일이 있다. 문학적 조루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처럼 독특한 피로 현상을 보인다••• 그러나 그 창작 에너지가 감퇴하고 있는 것은 누가 봐도 확실하다. 그것은 그 또는 그녀의 체력이 자기가 다루고 있는 독소와 싸워 이길 수 없었던 결과가 아닐까, 하고 나는 추측한다. 이제까지 독소를 자연스럽게 능가해 왔던 육체적인 활력이 하나의 정점을 지나면서 그 면역 효과를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또는 그녀는 여태껏 해온 것과 같은 주체적인 창조 행위를 계속해가는 것이 어려워진다 ••• 나는 되도록 그와 같은 위축 현상을 피하고 싶다. -153p
29살에 등단한 그는 전업 작가로 바뀌고 난 후 체중이 불고 체력이 떨어지는 걸 느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운동을 했는데 수영, 테니스 등 다양한 운동을 해봤지만 언제나 할 수 있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며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달리기가 자신에게는 가장 잘 맞았다고 한다.
내 친구들 중에도 달리기를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달리기는 너무 지루해서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친구도 있다.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친구는 혼자 하는 운동보다는 함께하는 스포츠를 더 좋아하곤 했다. 외향적, 내향적 성향이 어느 정도는 운동을 선택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가령 무언가를 성취하지만 개인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헬스를 좋아한다. 무게를 올리고 그 전과 달라지는 내 몸을 보면서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같은 개인적 성향이지만 눈에 보이는 성취보다 내면의 성장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장거리 달리기나 요가와 같은 운동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물론 다는 아니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으나 개인적이고 극 내향적인 무라카미가 마라톤이라는 운동을 선택한 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걸 보면 그 연관성이 아주 없진 않아 보인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는 천성적으로 종합적 경향 같은 것이 있어서, 본인이 그것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정도이다. 경향은 어느 정도까지 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근본적으로 변경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천성이라고 부른다. -130p
내 생각에는, 정말로 젊은 시기를 별도로 치면, 인생에는 아무래도 우선순위라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해 가야 할 것인가 하는 순번을 매기는 것이다. 어느 나이까지 그와 같은 시스템을 자기 안에 확실하게 확립해놓지 않으면, 인생은 초점을 잃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주위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류보다는 소설 집필에 전념할 수 있는 안정된 생활의 확립을 앞세우고 싶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는 특정한 누군가와의 사이라기보다 불특정 다수인 독자와의 사이에 구축되어야 할 것이었다. -65p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116p
아무리 달리는 스피드가 떨어졌다 해도 걸을 수는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아마도 어렵게 될 것이다. -172p
그가 달리기를 대하는 방식이 곧 그의 삶의 방식이다. 이 책은 겉으로는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해 쓰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의 인생에 대한 에세이라고 볼 수도 있는 귀한 책이다.(무라카미하루키는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쓰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에서 빠질 수 없는 것. 술, 음악. 아쉽게도 달리기에 관한 이야기다 보니 술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지만 그가 달리기를 하면서 들었던 음악에대해서는 많이 나온다. 그의 음악을 따라가며 러닝을 해봐도 좋을 것 같다.
어제는 롤링 스톤스의 <베거스 뱅커 Bcggar s Banguet)을 들으면서 달렸다. <심퍼시 포 더 데빌 Sympalthy For The Devi>의 예의 '후후 woo woo)라고 하는 펑키풍의 백코러스는 달리는 데 실로 안성맞춤이다. 그 전날에는 에릭 클랩튼의 <렙타일 Reprile>을 들으면서 달렸다. 어느 쪽이나 흠잡을 데 없는 음악이다. 마음에 와닿고, 몇 번 들 어도 질리지 않는다. 특히 <렙타일>은 달리면서 꽤 여러 번 들었다.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렙타일>은 천천히 러닝을 하는 아침에 듣기에 딱 좋은 앨범이다. 강요하는 듯한 느낌과 부자연스러움이 티끌만큼도 없다. -147p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살랑살랑 달리는 이야기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정말 틀렸다. 그는 매년 풀코스 마라톤에 출전하고 100km를 뛰어야 하는 극한의 울트라 마라톤까지 참여하는 집요함을 가진 진정한 마라토너였다. 그가 오래 달리면서 느껴지는 신체의 고통을 어찌나 잘 묘사하는지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나도 함께 미간이 찌푸려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3킬로 지점까지는 엄청나게 고통스러웠다. 느슨하게 돌아가는 육류 다지는 기계 속을 빠져 넘어가는 쇠고기와 같은 기분이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은 있지만, 아무튼 몸 전체가 말을 듣지 않는다. 자동차의 사이드브레이크를 힘껏 당긴 채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이 뿔뿔이 흩어져 당장이라도 해체되어 버릴 것 같다. 기름이 다 떨어지고 볼트가 풀리고 톱니바퀴의 아귀가 안 맞는 것이다. 스피드는 급속하게 떨어져 가고 뒤에서 오는 주자에게 차례차례 추월당하고 만다. -169p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들을 많이 읽었다. 소설도 5-6권 정도 읽었고 에세이는 그보다 더 많이 읽은 것 같다. 나에게 그의 소설은 어느 정도 호불호가 있지만 그의 에세이는 백 퍼센트의 확률로 무조건 좋아했다. 태어난 나라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나이도 다른 그에게 나는 마음속 깊은 공감을 느끼고 생각의 과정이 비슷하다고 느낀다. 사실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들이 그렇게 느끼기 때문에 그가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달리기라는 하나의 소재로도 이렇게 다채로운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또 한 번 존경심을 느낀다.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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