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는 2시간 10분남짓의 러닝타임을 가지고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영화 관람자로서 은희를 보았던 게 아니라, 내가 은희가 되어 그 사건들을 함께 겪었다.
벌새를 소개하는 문장에서 빠지지 않는 단어는 ‘보편적’이다. 분명 우리들의 이야기다. 형태는 다르고 상황은 다를지라도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가 겪는 일이다.
이 영화가 가지는 힘은 모든 캐릭터들이 있을 법하다는 것에 있다. 누구 하나 이해가 가지 않는 인물이 없다.
가부장적이고 도둑질을 한 딸을 경찰서에 그냥 보내라고 매정하게 말하지만 딸이 아플 때 진정으로 울어줄 수 있는 아버지.
자식들에게 희생적인 어머니면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바람난 남편을 모른 척해 주는 어머니.
늘 미운오리 취급받으며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수대교 붕괴사건으로 친했던 친구들이 죽자 죄책감을 느끼는 첫째 딸.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폭력적인 성향을 띠지만 가족들의 기대감에 대한 압박에 괴로워하는 아들.
남모르는 고민을 항상 가지고 있는 듯하며 은희를 부드럽게 이끌어주는 김영지 선생님.
친했지만 문방구에서 물건을 훔치고 은희의 가게를 이르는 친구 지숙이.
은희를 동경했지만 ‘학기가 바뀌었잖아요’라는 말로 은희를 배신한 유리.
그 안에서 혼란을 겪으며 성장해 나가는 은희.
이 영화에서 다채로운 인물만큼이나 미숙한 아이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부분이 인상 깊었다.
유리는 은희를 동경하고 은희는 영지선생님을 동경한다. 아직 어린아이들에게 동경받기도 하고 하기도 하는 일들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동경할 땐 자신이 작아 보이지만 동경받을 땐 자신이 한없이 대단한 존재가 된 것만 같다. 나는 동경 받든 동경 하든 똑같은 사람인데 말이다.
성장은 어느 순간 온다. 아니 성장은 여러 모습으로 다른 시간들 속에서 온다. 하지만 내가 성장했다고 문득 깨닫는 순간은 어느 순간 온다.
성장했다고 느끼는 순간은 모든 사람과 사물이 낯설게 보인다. 온 세상에 나만 존재하는 듯 고요해지고 혼자가 된 느낌이 든다. 소설 속 1인칭 주인공이었다가 갑자기 전지적 작가가 되어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하다. 기분 좋은 외로움이다. 남들은 모르는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된 듯한 기분이 되기도 한다. 나에겐 성장은 그렇게 왔다.
맨 마지막 은희가 학교 운동장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지은 표정은 나의 그 성장의 순간의 감정을 떠올리게 했다.
94년 중학생 은희가 겪었던 이야기에 내가 공감하고, 은희를 연기한 2003년생 박시후 배우가 공감한 이유는 시간은 다르고 사건도 다르지만 결국 어떤 형태로 모두가 겪었던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순간의 사건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건 속에서 우리가 겪었던 '감정'에 대한 이야기 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세계는 계속해서 바뀌고 기술은 발전하지만 결국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감정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의 마음을 편지로 전했는지, 전화로 전했는지, 카카오톡으로 전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사람 때문에 지새운 밤. 조그만 그의 말에도 쉽게 설레었던 그 감정이 중요한 것이며 보편적인 것이다.
어떤 것에든 물드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한동안은 이 영화가 주는 여운에 물들어 있을 것 같다. 아니 내가 성장하기 시작했던 그 시절에 물들어 있을 것만 같다. 손톱에 들이는 봉숭아 물만큼 꽤나 기분 좋은 물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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